* 스포일러 주의
영화 리뷰에 앞서
'승부'는 실존 인물인 조훈현과 이창호, 한국 바둑계를 뒤흔들었던 스승과 제자 간의 수십 년간의 대결을 모티프로 만든 영화다. 김형주 감독이 연출하고 이병헌과 유아인이 각각 조훈현과 이창호 역할을 맡아 극의 중심을 이끈다. 단순한 바둑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 작품은 바둑이라는 프레임 속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과 권위, 욕망, 그리고 성장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스포츠 영화이면서도 심리극에 가까운, 그래서 그런지 조용히 긴장감이 흐르고 한 수 한 수의 싸움보다도 시선, 호흡, 간격 같은 비언어적인 장치들이 오히려 더 깊게 파고든다. 한 명의 스승과 한 명의 제자가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다시 멀어지는 그 긴 시간의 흐름을 이 영화는 꽤나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병헌의 연기는 조훈현이라는 캐릭터를 단순한 승부사로 만들지 않는다. 유아인의 이창호 역시 단단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내면을 보여주며 대칭적인 감정을 형성한다.
줄거리
영화는 바둑 신동 이창호가 조훈현의 제자로 들어가며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그의 성장은 단순히 바둑의 실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훈현이라는 절대적인 존재,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압박은 승리의 기쁨과 동시에 자괴감, 외로움도 함께 불러온다.
이 영화는 스승과 제자가 결국 같은 바둑판에서, 같은 룰로 싸워야만 하는 순간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감정은 만만치 않다. 조훈현은 제자에게 진다는 것, 그것이 갖는 의미를 감당하려 애쓰고, 이창호는 스승을 넘어야 한다는 그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다. 그런 두 사람의 대결은 단순한 승패 이상으로 확장된다.
승부 그 자체보다 중요한 감정들.
바둑은 흑과 백으로 나뉜다. 분명하고 단순한 규칙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 하지만 승부는 그 이면을 보여준다. 규칙 바깥에 있는 감정, 체면, 관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조훈현과 이창호는 같은 바둑을 두고 있지만, 각자의 게임을 하고 있다. 조훈현에게 바둑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었고, 이창호에겐 벗어나고 싶은 굴레이자 넘어야만 하는 산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승부'는 단순한 바둑판 위의 싸움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이기는 것, 지는 것, 그 경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숨기고 견뎌야 하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던진다.
둘 사이를 잇는 제 3의 시선
중간 중간 두 인물 사이를 메워주는 시선이 있다. 바둑계 관계자들, 기자들, 가족들, 그리고 관객의 시선. 모두가 조훈현과 이창호의 싸움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본다. 그들은 그 싸움을 해설하거나 감탄하거나, 때론 두 사람 중 하나를 응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안의 고통은 알지 못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그 외로움을 직시하게 한다는 점이다. 승리한 사람도, 패배한 사람도 결국 혼자 남는다. 그걸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울림이 컸다. 특히 결말 부분, 이창호가 조훈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복잡하다. 승리의 기쁨과 동시에,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너무나 익숙한 존재를 떠나보내는 감정이 스며 있다.
또한 이병헌과 유아인이라는 배우는 그 감정을 오롯이 체현해낸다. 대사 한 줄 없이 시선을 두는 방식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되고, 마주 앉아 있는 장면에서조차 기류가 달라지는 걸 보여주는 건 이 배우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는 대결의 끝에서 누가 이겼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이 남았는지를 묻는다. 그 질문을 오래 붙잡게 만드는 것, 그게 이 영화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된다.
“실전에선 기세가 8할이야.” -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짧지만 묵직한 말이다. 바둑판 위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기세라는 건 결국 자신을 믿는 마음, 눈앞의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는 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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